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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천 시

대창면 김창열 전 노인분회장(전 시의원), 대창의 산타로 불리워지고

영천시민신문기자 2016. 8. 2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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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창면 김창열 전 노인분회장(전 시의원),
           영창중.대창농협.대창금고.대창농촌지도소 건립에 헌신 




대창면의 살아있는 산타로 불리는 김창열 전 대창면 노인분회장(82 전 시의원)
김 회장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대창면 공무원 격려 식사 대접, 매년 복사꽃 축제 타올 8백장, 노인회 분회장 및 전 회원 점심과 목욕, 연말이면 선물 전달, 각 경로당 기름 한 드럼씩을 전달하며 대창의 산타로 불리고 있다. 이런 이유는 한마디로 자신이 기초를 마련한 오늘의 대창이 영원한 대창으로 번창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대창면에서 일어난 모든 현대일, 즉 영창중학교 건립, 농촌지도소 건립, 대창새마을금고 건립, 대창농협 건립, 대창면 전기 공급, 대창면 새마을교육 1기생, 젖소 농사 처음 시작 등 수없이 많은 봉사활동 자리를 맡아 묵묵히 말없이 추진하고 오늘의 대창면 기초를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김창열 전 노인회장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김 회장은 5.16 군사혁명 후 어렵게 생활했다. 말하면 학교는 금호중학교를 겨우 다녔으며, 경주 문화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형편이 어려워 졸업은 못했다. 체중미달로 훈련소에서 결국 퇴출되고 군대 가지 못했다. 20대 중반부터 형편이 어려운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집안 도 어려워 당시는 농사 보다 산 사방사업에 참여, 밀가루 배급 등 먹을 것을 조금 주기 때문에 그런 일 밖에 하지 못했다. 혁명전에는 ‘작두보리’가 최고 먹을 거리였다.


군사혁명 후 영천군청 잠업계에서 계장이 이것을 가져가 한번 해보라고 권유, 뽕나무 씨였다. 씨를 가져와 밭에다 심었다. 작고한 아버지가 너무 나무랐다. 먹을 것도 없는데 뽕나무를 가져와 한다고, 농사 기술도 엉망이었다. 아무도 뽕나무 기술을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60년대 말, 새마을 사업이 시작한 시기다. 영천군 6기생, 대창면 1기생으로 새마을 교육에 참가했다. 당시 영천군 정병집 새마을 과장을 통해 교육에 참여했다. 교육 후 청와대를 구경하고 대통령 앞에 섰다. 악수 없이 인사만하고 나왔다.(나는 박 전 대통령을 영웅으로 생각한다)
대창면에 새마을사업을 시작했다. 영창중학교 자리에서 벽돌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김창열 노인회장이 70년대 대창면을 설명하고 있다



새마을금고도 처음 시작했다. 절미운동도 시작하고 금고가 잘 됐다. 그러던중
금고가 어려워지자 주민들이 금고를 맡아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금고 이사장을 맡았다. 이사장직 하면서 다른 직원들이 부실경영한 것을 이사장인 이유로 많은 돈을 변상하기도 했다. 이어 대창면 전기추진위원회(위원장 고 석기원)가 구성,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전기 공급 당시 전봇대 설계를 맡았다. 예산이 없어 소재지만 넣었다. 그런데 3년 뒤 대창면 출신 재일교포 고 노구용씨(직천리)가 1백만 원을 기부하면서 대창면 전체 전기가 들어갔다. 다른 면지역에도 전기가 거의 들어가지 않았을 때다. 66~7년경 영창중학교 건립을 위한 첫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활동했다. 정부에서 한 면에 한개 학교 세우는 계획하에 지원이 있었다. 75만 원이 주민들에 할당이 나왔다. 면내 다 돌아다니고 회의를 매일같이 했으나 10만 원 정도밖에 못 모았다. 그러던중 대구 사는 출향인 고 조익환씨(오길리)가 1백 만 원을 기부하면서 건축이 시작됐다. 당시 기분이 너무 좋아 아직도 생생하다.


1백만 원으로 논 5천 평을 샀다. 한 평이 2백 원 하는 시절이다. 땅 사고 건축이 완료한 시점이 70년 초였다. 학교 이름을 대창중학교로 하려고 했으나 벌써 사용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영천 영과 대창 창을 따 영창중학교로 명명하고 71년 1월 정식 인가를 받았다.(임고 고경 화북 자천중학교 등도 거의 비슷한 시기 건립) 전기 공급을 후원한 노구용씨가 또 학교에 1백만 원을 기부했다. 그래서 학교가 다른 지역보다 더 반듯하게 출발하게 됐다.


                       과거 대창면을 설명하며 웃고 있는 김창열 노인회장



농촌지도소 신축도 마찬가지였다. 땅은 면민들이 부담하고 건축을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는 방식이다. 주민들이 산에서 칙을 걷어 껍질을 이용해 벽지 원료로 팔아 조금씩 돈을 모아 추진했다. 통일벼 상금도 받으면 조금씩 보탰다. 이렇게 해서 만든 농촌지도소다. 건물 앞엔 아직 추진위원장(김창열) 이름이 남아있다. 이시기에 젖소 축산업도 처음 시작했다. 영천군에서는 정재상씨(북안면 전 시의원)와 둘이서 처음 시작했다.


대창농협도 이때 출범했다. 농협 시작하면서 지배인을 맡아라고 주변에서 추천해 지배인 중앙교육을 거쳐 단위조합으로 처음 대창농협을 설립했다. 교육에서 핵심은 농협 설립시 자리는 지역에서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하라는 명이 있었다. 계속 근무하다 조합장에 나오기도해 4대 조합장과 5대 조합장을 역임하고 현 건물 자리도 5대때 이전했다. 당시 조합원들이 양파로 나눠 ‘이전’에 대해 아주 시끄러웠다.


조합장 등 면내 모든 기관단체 일을 마치고 조용히 농사하고 지내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군의원 출마 권유가 너무 많았다. 초대 때는 금고 이사장 형을 받는 바람에 형 종료 시기가 남아있어 나서지 못하고 2대때 출마해 당선됐다. 


선거 때 당시 어린 4-H 회원들이 성장해 멀리 나가 회사 근무하면서 소식을 듣고 선거운동하러 이곳에 많이 왔는데, 참 눈물이 많이 나왔다. 지금도 말하면서 눈물이 고였다.


현재 시의회에 대해서는 “우리면 출신 의원이 없어 너무 안타깝다. 시의원 말이 시의원이지 선거 때만 이곳에 오고 나머지는 안 온다. 대창천 정비, 소재지 도로, 진량 방면 도로 협소해서 마지못해 살고 있다. 이런 점을 잘 해결했으면 한다”고 했다.


영창중학교 통합 소식을 처음 듣고는 “큰 딸이 1회 졸업생이다. 학교를 지키지 못해 아이들에게도 면목이 없고 면민들 보기에도 그렇고 속만 상하고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의 이 같은 봉사에 큰 아들인 형표씨(거제시 파티마정형외과 원장)도 닮아 면민들에 멸치 선물, 어버이날 경로당 기름 전달, 퇴직 면장 격려, 복사꽃 축제 축의금과 기름 상품권(1백만 원)을 전달해 오고 있어 2대째 산타 가족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가족은 동갑인 부인 조정숙씨와 4남 1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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